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소담출판사 펴냄
p183


열명의 여고생, 여섯가지 이야기. 몇분단 몇번째 줄 자리에 앉게 되는지가 하나의 사건이 되고, 누구와 점심 먹는지가  중요한 열일곱 여고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의 공간에서, 혹은 하나의 시간과 사건에서 만나고 엮이는 같은반 여고생들의 이야기.

작정하고 책을 읽기 시작한지도 한참이 되었는데, 첫번째로 읽게 된 '일본소설'이다. '소설' 이라는 장르 자체를 좋아하지 않고, '일본'이라는 말이 붙은 단어와 물건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다. 이 소설의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들 - 제목만 들어도 익숙할법한 <냉정과 열정사이, Rosso>, <호텔 선인장>, <울 준비는 되어 있다>,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도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다. 언젠가 친구가 선물해 준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도 가지런히 책장에 꽂혀만 있다.
오후에 약속이 있던 일요일 오전. 두시간 내에 읽어낼 수 있는 책을 고르던 중에 우연히 이 책을 골라내었는데, 아무래도 앞으로는 '일본소설'도 열심히 읽게 될 것 같다. 여고생들의 악세사리를 놓치지 않고 표현해 내는 솜씨와 같은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느끼는 감정들을 알아차리는 능력은 정말 놀랄만 하고 따라하고 싶은 감각이다. 요즘 내가 연습하고 있는 '부드러운 글쓰기'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들을 챙겨 읽어야 겠다. 그녀와 함께 일본의 3대 여류작가라고 불리는 요시모토바나나,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도 함께 찾아 읽어야 겠다.


열일곱살의 날들을 기억하나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의 모습과 다른 사람들의 추억 속에 멈춰진 내 모습이 너무도 다른 모습일때 나는 당황하게 된다. 때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 나의 기억 속에서 밀어내 버렸거나 내가 기억하고 싶은 모습으로만 담아두었던 그 이야기들이 가끔씩 다른 사람의 모습처럼 내 머릿속에 떠오를때 나는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그 누구에 의해 떠올려 지지 않은 기억이라 할지라도, 그런 모든 시절의 이야기들이 지금의 나를 감싸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 소설은 이런 기억속의, 어쩌면 열일곱살의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한번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자신이 불감증이라 생각하는 기코쿠.
시간의 흐름이 뒤틀리고 엉뚱한 곳에서 멈춰버려 세상으로 부터 단절을 고하는 에미, 그리고 그런 에미를 절대적인 친구로 여기는 모에코.
엄마와는 친구처럼 가까운 관계지만 남자친구에게서 새로운 감정을 발견하고 비밀이 생기기 시작하는 유즈.
비만때문에 컴플렉스를 갖고 있고, 날마다 사탕일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독약 처방을 내리는 카나.
결혼하지 않은 이모와의 관계에서 성숙함과 어리숙함이 공존함을 배워가는 유코.
섹시한 피부와 앳된 얼굴로 남자를 혼란케 하는 미요.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그 언젠가는, 지금의 나의 전부인양 목을 매는 일들 또한 열일곱살의 기억처럼 내 기억 어딘가에 내동댕이 쳐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떠 오르는 날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혹은 지금의 나를, 과거의 나를 낯설게 받아들일 것이다.
기억에서 사라진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지. 그리고, 어느날 문득 그런 기억들이 떠오르더라도 당혹스러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엄마와 둘이 생활하면서, 저녁을 먹고 이렇게 나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엄마는 목욕을 하고 있을 때가 유일하게 외롭다. 목욕탕은 부엌을 사이에 두고 거실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엄마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소리가 잘 들린다. 웅 하는 온수기의 소리가 들리면 나는 왜인지 견딜 수 없도록 외로워진다. 엄마가 어디 아주 먼 곳으로 가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아주 멀고,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곳. - 손가락 (33)

나는 그룹이나 동아리 같은 감각을 이해할 수 없다. 친구란 훨씬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옛날부터 그렇다. 옛날이란 에미를 만나기 전을 뜻하는데, 나는 그 무렵부터 줄곧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요컨대 아는 사람과 친구와는 전혀 다르다고. - 초록고양이 (72)

"나는 초록 고양이가 되고 싶어. 다시 태어나면."
보라색 눈의 초록 고양이, 라고 말하고 에미는 꿈을 꾸듯 미소 지었다.
"그 고양이는 외톨이로 태어나 열대우림 어딘가에 살고, 죽을 때까지 다른 생물과는 한번도 만나지 않아." - 초록고양이 (84)

때로는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어린 탓이 아니라 엄마가 나이를 너무 먹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똑같지 않다. 전혀 다른 차원이다. 무언가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리다면 언젠가는 이해할 때가 온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아주 아주 슬픈 일이다. - 천국의맛(125)

목도리는 같은 것을 두 개 갖고 있다. 번갈아 하고 다니면서 코를 묻었을 때 세제 냄새가 나도록 종종 빤다.
그러고 있으면 굉장히 안심이 된다. 주위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그러고 있으면 나만의 세계에 있는 셈이다. - 사탕일기 (150)

독신 생활이 자유롭고 편하기는 한데, 한가지 곤란한 일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가출할 수 없다는 것.
"그렇잖아, 내가 가출해봐, 그건 절대 가출일 수 없잖아. 돌아오면 여행인거고, 돌아오지 않으면 이사잖아."- 비, 오이, 녹차 (162)


하지만...
일본과의 정서적 차이일런지는 모르지만, 열일곱살 치고는 모두 너무 성숙해 보이는 주인공들. 나도 그때 이렇게 성숙했을런지 잠시 헷갈린.


@ 뎀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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