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3 지하철 풍경

사생활 /   2007. 6. 27. 07:25

어제 저녁 지하철에서 겪은 황당 사건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친구와 쇼핑을 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12시가 되어가는 시각. 혼잡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가까스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쇼핑으로 피곤한 다리를 두드리고 있는데.
내 앞으로 만취 상태의 아가씨가 섰다.
전철의 흔들림과 상관 없이. 좌우로 몸을 흔들어 댔다.
곧 내 앞에서 털썩 주저앉을 기세였다.
왜 하필 내 앞에 섰냐며 약간의 궁시렁거림이 일었지만.
내 위로 쓰러졌을 때의 난감함과 막연한 안쓰러움, 그리고 내가 젊었을 때의 비슷한 경험이 겹쳐져 피식 웃으며 자리를 양보했다.
내가 앉았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두 자리 빗겨난 자리에 자리잡고 섰다.

그때 갑자기 옆쪽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 어깨를 두번 치고선. 왜 자리를 양보해요?
당황해서. 힘들어보여서요. (특유의 친절한 웃음을 보였다.)
아가씨를 째려보듯이 내려보며. 자리 양보해 주면 안 돼요. 그럼 버릇나요.
적절한 답변을 찾아 내지 못해. 아 예에. (또 다시 웃음을 보였다.)
거기서부터 내가 내릴 때까지 왜 자리를 양보하냐며. 도대체 왜 저러고 다니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한번 자리 양보하면 버릇 난다며. 그 아가씨를 향한 끊임없는 훈계가 나를 통해 전달됐다.

아직 젊고 싱싱해서 무엇이든 해 볼만한 20대의 아가씨와
어린 나이에 술에 잔뜩 취해 다니는 상황이 절대 이해될 수 없는 40대의 아주머니의 입장 차이에 내가 서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나에게로 모아져 있었고.
지은 죄 없이 아주머니의 훈계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내야 했다.
다소 황당하고 짜증나는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내 마음은 아주머니 쪽으로 옮겨갔다.
젊은 아가씨를 이해하기에 이미 너무 나이가 들어 버린 아주머니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리다면 언젠가는 이해할 때가 온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아주 아주 슬픈 일이다.

젊은 아가씨도 나도 조금 더 나이가 들면 그 아주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는 앞으로도 절대로 젊은 아가씨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 졌다.
이미 객기도 낭만도 아닌 그런 일들을 벌이기에 아주머니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
한번도 그것을 경험해 보지도. 이해해 보지 못한채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일들. 빼놓지 말고 누려봐야겠다.
30대가 되어서는 주책이라는 흉이 따를 일들. 결혼해서는 해 볼수 없는 일들. 가족과 함께한 시간 동안에는 눈치가 보일 일들. 애인이 생기면 누릴 수 없는 것들.
혼자 여행하기, 친구와 밤 늦게까지 마음 나누는 수다, 소개팅, 미니스커트 입기, 아는 오빠와 영화보기, 새벽 2시 귀가, 비싼 화장품 나에게 선물하기...

머지않아.
모든것들을 하기에 나이가 너무 들어버렸다는 생각이 앞서는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러고 나면.
이런 일들은 내가 평생동안 경험해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들로 남아있을 테니까.


여러가지 생각으로 분주하고 짠한 아침이다.


@ 뎀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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