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우리 모두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음
책읽기 / 2009. 9. 20. 23:14
흔한일은 아니지만,
가끔 누구에게 선물하는지 어떤 취향의 사람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책을 추천해 달라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빌 브라이슨>, <성석제>, 혹은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추천 해 준다.
이들의 글에는 '우리가 이미 본 것을 눈여겨보도록' 하는 힘이 있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고, 어쩌면 오늘 아침에도 봤을 법한 흔한 일들을,
<빌 브라이슨>은 새로운 지식을 더해서,
<성석제>는 유머와 풍류를 더해서,
<알랭 드 보통>은 철학을 더해서, 풀어낸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대단한' 일로 정리하는 '대단한' 작업을 '아무일 아니라는 듯' 해 낸다.
어렵게 꽈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단지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다.
우리가 너무 바빠서 지나쳤거나 혹은 너무 작아서 알아채지 못했던 느낌들을,
하지만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것들에 대해 놓치지 않고 자근자근 짚어준다.
이것이 유명 작가의 자기계발서나 검증된 베스트셀러 소설보다도
한 개인의 경험을 풀어 냈다 하는 에세이를 자신있게 추천해 줄 수 있는 이유다.
일의 기쁨과 슬픔도 그랬다.
'대중의 뇌리에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할 뿐더러
직접 관계된 사람들 외에는 그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 할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록할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라는 한 줄에서
그가 이 책을 써야만 했던 이유와 우리 모두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담겨 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일들이지만 이런 모든 일들이 제자리에서 제대로 이루어져야만
나머지 생활이 질서있게 돌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어쩌면 이 책을 통해 알랭 드 보통이 말하고 싶었던 건,
정보화 혹은 산업화 사회로 들어서면서 우리에게 싹트기 시작한 '무관심'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모든 것들이 공급되는 기적 같은 일들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 들이며 살고 있는 요즘 사람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당신들의 하루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돌려 말해준다.
오늘 아침 마신 물 한잔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읽고 있는 책이, 앉아 있는 의자가
나에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는지 '생각이라도 해 봤니?'라는
의미 있는 물음을 남겨줬다.
그나저나
비스킷 상자에 m자와 s자를 키울 것인지 눕힐 것인지 고민하는 대목에서 한참을 웃었다.
매일 반복 되는 내 일상을 보는 것 같아서.
캠페인 페이지에서 회사 로고를 어느 위치에 놓을지를 두고 집착하고. 목숨걸고.
하지만 이 또한,
'겉으로는 유치한 게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이 우리의 생존 자체를 위한 투쟁과 절대 거리가 멀지 않다' 라며 웃고 넘겨야겠다.
1.
200년 전 우리 선조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나 소유하고 잇는 한정된 수의 물건 하나하나의 정확한 역사와 유래, 나아가서 그 생산에 관여한 사람이나 연장까지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돼지, 목수, 직조공, 베틀, 우유짜는 아낙네와도 알고 지냈을 것이다. 그 이후로 구매 가능한 물품의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과 반비례로 물품의 유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거의 깜깜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현재 우리는 많은 물건을 실제로 손에 넣을 수는 있지만, 그런 물건들의 제조와 유통 과정이 어떠한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소외 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험할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 (39)
2.
의사는 보일러 고치는 법을 배우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기관차 운전사는 아이들 옷을 꿰매는 법을 배우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비스킷 포장 기술자는 창고 보관 문제를 공급망 관리 전문가에게 넘기고 자신의 에너지는 롤 포장 메커니즘 개선에 쏟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된다. 이런 완벽한 사회에서는 모든 일이 전문화 되기 때문에 아무도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85)
3.
우리의 과학 기술이 아무리 강력하고 우리 회사들이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현대의 일하는 세계의 가장 주목할만한 특징은 결국 내적인 것으로서 우리 정신의 한 측면을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널리 퍼진 믿음이다. 일을 중심에 둔 것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이 형벌이나 속죄 이상의 어떤 것일수도 있다고 주장한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처음이다. 경제적인 필요가 없어도 일은 구해야 한다고 암시하는 것도 우리 사회가 처음이다. 직업 선택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 사귀게 된 사람에게도 어디 출신이냐, 부모가 누구냐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길로 나아가려면 보수를 받는 일자리라는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가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116)
4.
"물을 본 적 있어요?" 테일러가 묻는다. "제대로 본 적이 있냐는거죠.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214)
5.
전기에 진짜로 고마움을 느낄만한 사람들은 오래전, 1950년대에 이미 죽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잘 확립되어 있는 기술에 감탄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전구가 위세를 떨치는 것은 노인에게 남아 있는 촛불에 대한 기억 때문이며, 전화가 위세를 떨치는 것은 전서구에 대한 기억 때문이며, 비행기가 위세를 떨치는 것은 기선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234)
6.
이런 성취들은 시간이 지나면 틀림없이 그 의미가 어느정도 퇴색할 것이다. 앞으로 3년만 지나면 7월 29일 오후의 일지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일지에는 시간 단위로 동료들과 만나는 약속이 촘촘하게 할당되어 있지만, 조만간 그 이름과 얼굴조차도 희미해질 것이다. (295)
7.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 줄 것이다. 완벽에 대한 희망을 투자할 수 있는 완벽한 거품은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엾은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 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품위있는 피료를 안겨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놓아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 줄 것이다. (368)